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도 토마스 (문단 편집) === 부활을 의심하다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aravaggio_-_The_Incredulity_of_Saint_Thomas.jpg|width=330]] || ||<:> <의심하는 도마>,[[카라바조]],1601~1602,[[상수시 궁전]] || [[예수]]의 [[십자가]] 죽음 이후, 그분의 [[부활]]을 믿지 않고 [[예수]]의 [[성흔|손과 옆구리에 난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나서야 믿겠다고 말하였고, 실제로 예수가 나타나서 '손가락을 옆구리로 넣어봐라'라고 했다. 손가락을 옆구리에 넣지 않았지만 직접 보고서야 예수를 주라고 인정하였다.[* [[요한 복음서]] 20장 27 - 29.] 고로 위의 성화는 틀린 것. 이 구절은 '''의심 많은 믿음'''이라는 설교의 예화로 자주 등장한다. '''a doubting Thomas'''('의심 많은 사람', '증거없이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라는 [[영어]] 표현의 유래이기도 하다. 워낙 이 예화가 유명해서, 토마스의 [[이콘|성화]]나 [[성상(조형물)|성상]]에는 [[손가락]]이 강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12사도|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 [[쌍둥이]](디두모)라고 불리던 토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br]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br]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Dominus meus et Deus meus)!!”'''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br] '''- [[공동번역성서]] 요한 복음서 20:24~29''' 이 사건 때문인지 개신교 주일학교에서는 별로 이미지가 좋지 못한 경우가 있다. 공관복음서에는 그 밖에 딱히 인상적인 행적도 없고. [[요한 복음서]]를 통해 보았을 때, 성격은 엄청나게 급하고 덜렁거렸던 모양. 반면 [[가톨릭]]과 [[성공회]]에서는 사도 토마스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보인다. 우선 그의 성격이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 옳은 것은 옳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성향의 보유자이기에, 그리고 무엇이든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어느 정도는 의심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무언가를 의심하면서도 그 본질을 정확하게 알고 싶어 하는,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의 존재를 늘 의심하면서도 하느님의 본질을 알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며, 실상은 하나도 모르면서도 그게 들킬까봐 질문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거나, 자신의 신념을 확고하게 고백하지 않고 회의하다 제 때에 알고 배워야 할 것을 자주 놓치게 되어 여러 면에서 진보가 더디고 깨우침이 느리거나 없게 되는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도 지적한다.[[http://ibosco.net/gospel/77334#acField|#]] 아울러 그런 의심조차 '불경하다'며 피하거나 내치는 일 없이 '봐라'라며 제자의 의혹을 풀어주고, 확신으로 가득 채워주었던 예수의 모습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http://news.catholic.or.kr/WZ_NP/section/view.asp?tbcode=SEC05&cseq=2&seq=115788|#]] 맹목적인 신앙을 지지하는 [[광신도]]들은 으레 이 구절을 들이밀며 '봐라 예수님도 덮어놓고 믿으라고 하셨으니 너희도 의심 같은 거 하지 말고 닥치고 믿으면 된다'라고 주장하지만, [[수사학]]의 관점에서 예수가 토마스에게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사가 뭐든지 안 보고도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역설법]]을 사용한 탄식에 가깝다. "보지 않고 믿어야 복된 사람"이라는 단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지 않고 믿으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고, 뭐든 스스로 확인하고 체득해보고 난 다음에야 지혜든 지식이든 터득할 수 있다"고, 어떤 희망적이지만 불가능한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현실에서의 필수적인 문제점과 요소를 더욱 강조하고 부각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비슷하게 [[이스카리옷 유다]]에게도 예수는 "아예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했는데, 이는 자신을 배반한 유다의 행동에 대한 저주나 분노라기보다는 유다 자신도 정해진 운명의 수순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가엾은 놈, 어쩌면 좋을까." 정도의 뉘앙스가 들어간 스승으로써의 탄식에 가깝다.[* 예수의 이미지라든가 또 운명상 움직이게 되는 입장상 유다의 배반은 유다의 책임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게 놓고 보면 저주와 분노보다는 탄식이 오히려 더 어울린다.] 이러한 성격을 가진 토마스이기에 그의 고백은 성경 속에서 더욱 강력한 설득력과 파급력을 가지게 된다. 토마스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Dominus meus et Deus meus)”이라는 고백은 지금까지도 예수를 설명하는 [[기독교]]에서는 가장 완벽한 신앙고백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한 문장만 가지고 밤새도록 기도하기도 했을 정도. 토마스는 [[성경]]상으로는 [[예수]]에게 육성으로 직접 [[야훼|하느님]]이라고 고백한 유일한 사도인데, [[베드로]]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여 사도들의 리더[* [[가톨릭]]과 [[정교회]]의 해석에 의하면 [[교황]]. 다만 [[정교회]]에서는 [[교황]]이 [[총대주교]]들 중 으뜸임은 인정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이지 교황에게 [[교회]]의 수위권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자리를 받았음을 생각해보면 토마스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 수 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어쩌면 신앙을 위해서는 토마스 사도의 불신이 믿는 제자들의 신앙보다 우리에게 더 유익할 것"이라고까지 평했을 정도.[[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729747&path=201808|#]] 한편, 이 신앙고백은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신격화하며 붙여진 칭호인 '주님이요 우리 하느님(Dominus et Deus noster)'에 대한 반발이라는 견해도 있다. 토마스의 일화는 과학주의나 경험주의, 나아가 낭만을 배척하는 [[리얼리즘]]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토마스는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재판관, 측량사 등 공정함과 관련된 직업의 수호성인이다. [[중앙일보]] 기자 문소영은 자신의 칼럼에서 어린 시절에 신부님께 들은 이야기라며 토마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칼럼의 요지는 난무하는 [[가짜뉴스]]를 두고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만 골라 믿는 상황에 대한 비판이다.) > 그리스도는 토마를 많이 아꼈습니다. 왜 그를 위해 일부러 다시 나타났겠어요? 성경의 다른 구절을 보면, 토마는 예수께 충실했고 그러면서 탐구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말씀이 이해 안 갈 때 다른 제자들이 대충 가만히 있어도 토마는 꼭 질문을 했어요. '''맹신하는 것보다 토마처럼 의심하고 질문하는 게 오히려 좋은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게 과하면 본인이 피곤하고 괴롭지요. 그래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http://news.joins.com/article/2121473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